챗봇의 답변으로 시작된 어떤 논문

Certainly…

2024년 2월 17일, Elsevier의 재료과학 학술지 『Surfaces and Interfaces』 온라인 판에 리튬금속 전지의 분리막을 다룬 논문이 게재되었다. 재미있게도, 서론은 다음 문장으로 시작된다. “Certainly, here is a possible introduction for your topic: Lithium-metal batteries are promising candidates for high-energy-density rechargeable batteries due to their low electrode potentials and high theoretical capacities.” 앞의 열 단어는 ChatGPT가 사용자의 요청에 응답할 때 붙이는 상투구이고, 그 뒤부터가 논문이다. 저자들은 챗봇의 답변을 복사해 붙이면서 답변의 첫 줄까지 함께 가져왔고, 그 줄은 투고, 동료심사, 편집, 교열, 조판을 거쳐 그대로 인쇄되었다.

이 논문의 부적절한 AI 사용 가능성은 PubPeer에 올랐는데, 툴루즈 대학의 컴퓨터과학자 Guillaume Cabanac이 자신이 운영하는 Problematic Paper Screener에서 지적했다. 이것은 2024년 3월 중순 기술 매체와 과학 블로그에 보도되었는데, 철회는 게재 석 달 뒤인 5월 31일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조작된 데이터도, 가로챈 아이디어도 확인된 바 없다. 다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작성했을 법한 문장이 하나 있었고, 원고 작성에서 출판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이 문제가 걸러지지 않았다.

등재지에서 일어난 일

이 사건에 보일 법한 첫 번째 반응은 “그런 잡지에서 일어난 일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Surfaces and Interfaces』는 2016년 창간된 Elsevier의 정규 학술지(ISSN 2468-0230)로, Web of Science(SCIE)와 Scopus에 등재되어 있고, SJR 기준 화학 분야 Q2, 최근 영향력지수는 5점대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연구업적 평가 기준으로 말하면 SCI(E) 등재지 논문으로 인정받는 잡지다. 약탈적 학술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신뢰하는 출판 체계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편 해당 학술지의 철회 고지(Surf Interfaces 2024;46:104550)는 “저자들이 공개 없이 생성형 AI를 논문 작성 과정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학술지 정책 위반이라는 우려”를 그 사유로 든다: AI를 썼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사실 Elsevier의 저자 정책은 글쓰기 보조로서의 생성형 AI 사용을 허용한다. 다만 원고 말미에 별도의 선언문을 두어 도구와 용도를 밝히라고 요구할 뿐이다. 저자들이 위반한 것은 ‘사용 금지’가 아니라 ‘공개 의무’다. 이 구분은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하다. 만약 저자들이 같은 서론을 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선언문 한 줄을 붙였다면, 그리고 챗봇의 첫 줄만 지웠다면, 이 논문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심사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논문 한 편이 게재되기까지 원고는 적어도 네번은 꼼꼼하게 읽힌다. 교신저자와 공동저자, 담당 편집인, 둘 이상의 심사자, 그리고 교열·조판 단계의 출판사 직원이다. 그러고 보면 그들 중 누구도 서론의 첫 문장을 읽지 않았거나, 읽고도 지나쳤다는 말이다. 전자라면 심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후자라면 심사가 무엇을 보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

먼저 동료심사는 원고의 과학적 내용을 평가하는 절차다. 심사자는 방법이 타당한지, 데이터가 결론을 지지하는지, 선행 연구와의 관계가 정확한지를 본다. 이런 관점에서 서론의 첫 문장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이해는 된다. 리튬금속 전지가 유망하다는 문장은 이 분야의 모든 논문이 쓰는 문장이 아닐까. 심사자의 눈은 그 다음, 실험 설계와 그림을 주목하기 십상이고, 챗봇 지문은 남아 있었다.
그다음 교열과 조판은 문장을 읽지만 내용을 읽지 않는다. 문법과 서식을 맞추는 사람에게 “Certainly, here is a possible introduction for your topic:”는 문법적으로 완전한 영어 문장이다. 대형 출판사의 교열은 상당 부분 외주와 자동화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문장의 출처를 묻는 단계는 없다. 결국 이 문장을 걸러낼 수 있는 사람은 내용과 문장을 함께 읽는 사람, 곧 저자 자신뿐이었다.

결국 이 논문을 걸러낸 것은, 이것도 흥미로운데, 출판 체계 외부에 존재하는 자동화된 탐색이었다. 처음 지적한 Cabanac의 도구는 “as an AI language model”, “regenerate response”, “as of my last knowledge update” 같은 문구를 전체 문헌에서 검색한다. Scholarly Kitchen이 2024년 3월 같은 방식으로 Dimensions를 훑었을 때 “Certainly, here is”로 시작하는 연구논문은 열 편이었고, 그중 여덟은 ChatGPT를 다룬 논문이었다. 전체 570만 편 가운데 두 편. 수치로는 위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지문을 남긴 논문의 수일 뿐, 지문을 지운 논문의 수는 아무도 모른다.

관련해서 어떤 규범이 있는가

사건이 일어난 2024년 초는 생성형 AI에 관한 출판 규범에 관련된 입장 수렴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점이다. COPE는 2023년 2월 성명에서 AI 도구는 제출된 연구에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저자가 될 수 없고, 저자는 AI가 생성한 부분을 포함한 원고 전체에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밝혔다. ICMJE와 WAME가 같은 해 같은 취지를 이어받았고, Elsevier를 포함한 주요 출판사들이 이를 투고규정에 옮겼다. 즉 이 논문은 규범이 없는 공백에서가 아니라, 규범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게재되었다.

하지만 선언문을 요구하는 정책은 저자가 선언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다. 심사자에게 AI 사용 여부를 감정하라는 지침은 어디에도 없고, COPE는 오히려 심사자가 스스로 탐지기를 돌리지 말라고 권고한다. 반면 일단 미공개가 드러나자 규범은 정확히 예정된 경로를 밟았다. 정책 위반이 확인되었고, 철회가 이루어졌으며, 고지문은 그 사유를 정책의 언어로 적었다. 즉 규범은 사후에나 작동한다. 이 사건은 ICMJE가 2026년 1월 개정에서 신설한 문장, 곧 AI 사용의 미공개는 정정 조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연구부정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조항의 선행 사례로 읽힌다. 2023년의 규범은 “공개하라”고 말했지만 공개하지 않았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2024년의 철회는 그 빈칸을 실무로 채웠고, 2026년의 개정은 그 실무를 문서로 만들었다. 규범은 사건을 예방하지 못했지만, 사건은 규범을 완성했다.

내부 검토의 부재: 사설이 없다

이 사건에 관해 『Surfaces and Interfaces』도 Elsevier도 editorial 을 내지 않았다. 확인한 범위에서 출판사의 공식 성명도 없다. 당시 보도들은 출판사의 입장을 인용하지 못했고, 한 논평자는 “논문은 수정도 철회도 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고만 적었다. 공식 기록은 철회 고지 한 건이 전부다.

철회 고지는 저자의 위반을 기록하는 문서다. 그것은 “저자들이 공개 없이 AI를 썼다”고 말하지, “우리의 심사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챗봇의 첫 줄이 어떻게 네 단계를 통과했는지, 심사자는 서론을 읽었는지, 편집인은 심사 보고서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같은 일을 막기 위해 무엇을 바꿨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출판 체계는 저자에게 설명 책임을 물었지만 자신의 설명 책임은 다하지 않았다. 발견된 것이 데이터의 결함이 아니라 심사의 결함이었음에도 편집위원회는 자기 반성을 하지 않는다. 이 사건을 저자의 위반으로만 기록하고 닫았다는 것은, 심사 과정의 실패를 설명할 의무를 출판 체계가 아직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남아 있는 질문

이런 질문이 남는다. 첫째, 공개의 문턱은 어디인가. 저자들이 ChatGPT에 요청한 것은 서론의 초안이었다. 같은 도구로 문법만 고쳤다면 Elsevier의 정책은 선언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법 교정과 초안 생성 사이에는 문장 다듬기, 구조 제안, 문헌 요약, 번역 같은 넓은 회색지대가 있고, 어느 출판사도 그 경계를 같은 자리에 긋지 않는다. 이 논문은 경계의 먼 쪽에 있었기 때문에 판단이 쉬웠을 뿐, 경계 자체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둘째, 규범은 무엇에 의존하는가. 이 논문이 적발된 것은 저자가 지문을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문을 지운 논문은 적발되지 않는다. 탐지기는 비원어민 저자를 오탐하고, COPE는 탐지기에 원고를 올리는 것 자체를 비밀유지 위반으로 본다. 결국 공개 의무는 저자의 정직에 기대어 있고, 정직하지 않은 저자는 부주의할 때만 잡힌다. 이것은 규범의 결함이라기보다 규범의 조건이다. 동료심사는 언제나 저자의 정직을 전제로 작동해 왔고, 생성형 AI는 그 전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가 얼마나 많은 것을 떠받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셋째, 한국의 학술지는 준비되어 있는가. 이 사건에서 Elsevier가 철회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위반할 조항이 투고규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Ahn(2024)의 조사에 따르면 KCI 상위 100종 의약학 학술지 가운데 AI 조항을 둔 곳은 18%였다.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가 2025년 5월 가이드라인 4판에 상세한 지침을 넣었지만, 개별 학술지의 투고규정이 그것을 받아 적지 않으면 구속력이 생기지 않는다. 같은 문장이 국내 학술지에 실렸을 때, 편집인이 기대어 철회할 조항이 있는가?

실수로 한 문장을 다듬지 않았고 그 문장은 네 단계를 통과했다. 구조의 문제다. 위반이라면 철회로 해소 되겠지만 구조는 여전히 설명을 요구한다. 이 사건에서는 아직 설명이 없다.

참고

안락사는 좋은 죽음인가? — 죽음에 대한 네 가지 태도

2026년 10월 15일

‘좋은’이라는 말이 걸린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하는 창구에서 드물지 않게 듣는 말이 있다. “안락사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이거 쓰면 되는 건가요?” 국민의 80% 가까이가 안락사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와 겹쳐 놓으면, 이 말은 한 사람의 착각이 아니라 하나의 정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세 가지가 섞여 있다. ‘안락사’라는 단어, ‘나을 것 같다’는 판단, 그리고 ‘이거’라고 가리킨 서류에 대한 오해. 셋을 하나씩 풀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일이다.

제목부터 걸리는 데가 있다. 좋다는 것은 선택할 만하다, 바람직하다, 만족스럽다는 뜻인데 이 수식어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죽음은 억울하다는 것이 한국인의 기본 정서이기에 더 그렇다. 그러니 지금 오가는 좋은 죽음 논의는 실상 덜 억울한 죽음, 덜 나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이고 죽는 게 낫겠다”는 말을 “이젠 좀 살겠네”로 바꾸는 일, 그 역설적인 작업이 우리가 ‘좋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에 가깝다.

그런데 이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뜻밖의 곳에 도착한다. 안락사가 좋은 죽음인지 묻다 보면 우리는 안락사에 대해서보다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글의 끝에서 그 태도를 네 단어로 정리해 보려 한다.

안락사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들

일상어 ‘안락사’는 너무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질병의 경과에 따라 맞는 자연사와 병사, 임종과정에 들어선 환자에게 무의미해진 침습적 치료를 하지 않는 연명의료의 중단과 유보, 말기 환자가 의사가 처방한 약을 스스로 복용해 죽는 조력사망, 의료인이 약물을 투여해 생명을 끝내는 적극적 안락사. 사람들은 이 모두를 ‘안락사’라고 부른다. 연명의료 중단도, 통증을 줄이기 위한 모르핀 주사도 안락사라고 불리는 마당이면 이 단어는 행위를 지시하는 개념어로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사전의 정의도 사정을 낫게 하지 못한다. 옥스퍼드 사전은 치료할 수 없거나 고통스러운 질병의 환자, 혹은 돌이킬 수 없는 혼수 상태의 환자를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라 하고, 피터 싱어는 삶의 질이 극도로 낮아져 삶의 연장이 고통만을 뜻할 때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생명을 끝내는 것이라 한다. 둘 다 조건이 모호하고 행위의 주체와 방식이 비어 있다. 쓸모 있는 구별은 행위를 네 요소로 분해할 때 나온다. 어떤 조건에서, 누가, 무엇을 하여, 어떤 결과에 이르는가. 연명의료중단은 임종과정 환자를 의료인이 확인하고 치료를 중단해 임종에 이르는 것이고, 의사조력사망은 말기 환자를 의료인이 확인하고 약을 처방해 환자가 복용하여 사망하는 것이다. 결과 칸의 단어가 다르다. 앞의 것은 질병이 원인인 ‘임종’이고, 뒤의 것은 약물이 원인인 ‘사망’이다. 이 한 칸의 차이가 법이 선을 긋는 자리다.

우리 제도는 이 선을 세 칸으로 나눈다. 임종과정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유보하는 것은 허용된다.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내용이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바로 이 칸의 문서다. 건강이 나빠진 상태, 수개월 안에 임종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말기에서 자신의 가치 판단에 따라 치료를 거부하는 권한은 제한된다. 그리고 건강 상태를 포함한 종합적 판단으로 생명을 끝내는 일은 금지된다. 행복추구권에서 자기결정권이 나오고 거기서 치료를 선택하고 거부할 권리가 나오지만, 그 선택이 죽음으로 직결되는 순간 제약이 생기고, 죽음을 직접 목표로 삼는 순간 법은 그것을 자살이라 부른다.

그러니 창구에서 “이거 쓰면 되는 건가요”라고 묻는 분에게 답은 분명하다. 의향서는 죽음을 앞당기는 요청이 아니다. 말기 이전 단계의 치료 거부도, 통증 조절이나 영양 공급의 중단도, 가족의 부담을 이유로 한 생명의 종결도 아니다. 임종과정에 들어섰을 때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 두는 것이며, 호스피스를 이용하겠다는 의사를 함께 적을 수 있고, 언제든 바꾸거나 거둘 수 있다. 그런데 이 답을 하고 나면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렇다면 이 분이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죽음은 왜 나쁜가

죽음을 미룰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가장 심각한 것은, 사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긴 한데, 의미 없는 식물적 생명만 유지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뇌사나 식물상태처럼 의학적으로 깔끔하게 정의되는 상태보다 수치와 영상으로 정립되지 않는 상태가 우리를 더 곤란하게 한다. 1년째 와병 중이지만 병은 없는 90대 노인. 당뇨 합병증으로 5년째 투석을 받는 콩팥병 환자. 뇌졸중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 급식관에 기대어 여섯 달을 견디는 80대. 의식은 낮아졌으나 뇌가 기능을 잃은 것은 아니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이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남은 시간 동안 고통을 겪는다면, 그리고 그 고통을 덜 방법이 없다면, 생명의 유지는 고통의 지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고통은 통증만이 아니다. 섬망과 불안, 호흡 곤란, 구강건조와 변비, 배뇨 문제가 통증만큼 어렵다. 그리고 고통에는 의학적인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고립, 가족 안의 갈등, 역할을 잃은 데서 오는 상실감, 주변 사람에 대한 미안함, 실존적 두려움. 이 비의학적 고통에는 의학적 해결을 요구할 수 없고, 그래서 조력사망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다룬다.

여기서 철학적으로 짚어 둘 것이 있다. 회피도 선호의 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좋은 것을 향하지만, 싫은 것을 멀리하고 없애려는 본능은 그보다 강하다. 어떤 선택에 이유를 요구할 수 있지만 그 이유가 꼭 더 나은 것에 관한 것일 필요는 없다. 끔찍하게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해 매우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도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안락사, 곧 죽음보다 나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사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는 이 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문제는 의학적이지 않은 문제가 죽을 만큼 나쁜 경우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죽음의 나쁨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죽음은 모두가 피하려는 나쁜 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공허로 보고 거기에 좋고 나쁨을 붙이는 것을 헛수고라 여긴다. 그럴싸한 말이다. 좋고 나쁨은 판단할 사람을 전제하는데, 가장 중요한 판단자가 아무 표현도 할 수 없다면 그 평가는 살아 있는 사람의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살아남은 우리가 죽음을 나쁘게 여기는 이유를 들춰 보면 시신이 주는 감각, 정리의 어려움, 다시 교감할 수 없다는 상실감이 나온다. 이것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안락사를 생각하는 중에는 죽음을 죽는 사람의 관점에서,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

죽음이 나쁜 이유로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살아 있는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한다. 둘째, 죽는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있다. 셋째, 죽음은 삶의 좋은 것을 경험할 기회를 빼앗는다. 넷째, 죽는 사람과 주변의 관계 안에서 죽음은 나쁘게 평가된다. 나는 이 가운데 셋째만이 조건과 무관하게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째부터 보자. 죽음을 피하려는 것은 동식물을 통틀어 존재하는 경향이고, 그래서 우리는 존재를 건강하게 유지해 삶의 목적에 부합하게 하는 것을 의무로 여겨 왔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죽음을 피한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실현할 조건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존재의 지속이 삶의 목적과 아무 연관이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큰 자연의 관점에서 더 ‘자연’스럽다.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 조건부를 증명한다. 둘째, 죽는 과정의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지만 죽음 자체의 평가 기준은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보지 못하고 ‘죽어 있음’을 보며, 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의 과정이 있고,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 분투하는 사람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넷째, 남겨진 사람의 슬픔과 두려움은 죽음이 나쁘다는 판단의 흔한 원천이지만 죽는 사람이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불편한 역설이 숨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단지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투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결론은 우리가 바라지 않는 종류다.

남는 것은 셋째다. 살아 있는 모두에게 원칙적으로 열려 있는 것은 기회뿐이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위로받고 분노하거나 수용하고 성숙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기회. 기회의 균등, 추구할 자유, 도구의 평등 같은 인권의 말들이 모두 여기서 나온다. 죽음은 경험 자체를 앗아가지도, 이전의 경험을 지우지도 않는다. 다만 앞으로 맞이할 기회를 앗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죽는 과정은 그 기회를 종종 고통으로 채울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기회의 박탈을 애석해한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하나를 더 구별해 둘 필요가 있다. 죽음과 죽는 과정과 죽음 이후는 다르다. 죽음 자체는 현상이고 죽음 이후는 상태다. 둘 다 고정되었거나 자연적인 것으로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죽는 과정만이 인간의 사건이고 인간의 일이다. 우리가 손댈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가족과 사회의 관점에서 내리는 죽음의 평가는 납득할 수 있지만 충분한 이유는 아니다. 개인의 가치평가는 중요하지만, 존재의 지속이 존재의 목적에 비추어 의무의 성격을 갖기에 유일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죽는 과정의 고통은 죽음의 평가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쁘고 최대한 예방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나쁨은 경험 기회의 박탈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머무르는 공간, 인간적 관계, 치료의 선택지 모두가 이 경험에 비추어 결정되어야 하고, 이 기회가 아직 있는 한 우리는 생존의 의무를 받아들이게 된다.

조력사망 논의가 보여주는 것

조력사망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겪는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고통이 있고, 그 시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의료를 계속하는 것의 정당성이 의심스럽다. 의학적 조치가 다양해져 한 가지 기준을 모두에게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가치를 반영한 치료 결정은 죽음의 방식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요구가 있고, 의학은 식물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환자의 숙고된 가치판단을 실천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책임의 요구가 있다. 찬성 쪽은 죽음의 방법과 시기를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반대 쪽은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한다. 생명의 불가침성, 부적절한 시행의 위험, 의료전문직의 자기 인식이 반대의 근거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음을 요청하는 동기를 들여다보면 논쟁의 틀 바깥에 있는 것들이 보인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고, 사회적 평판을 지키려는 자기 배려가 있다. 살아 있는 것의 가치를 잃었다는 사회적 압력이 있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타인 배려가 있다. 창구에서 안락사를 말하는 노인의 상당수는 마지막 동기를 말한다. 그런데 가족의 부담은 조력사망 제도가 전제하는 조건, 곧 말기와 회복 불가능과 의학적 고통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여기가 앞에서 미뤄 둔 지점이다. 조력사망 제도는 의학적 조건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고, 사회적·인격적 고통은 그 설계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의료화된 죽음을 걱정하는 단계에서 비의학적 고통은 처음부터 다뤄질 수 없다. 안락사에 대한 우려의 실체가 여기 있다. 그것은 의학적이지 않은 문제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 곧 의료화된 자살에 대한 우려다. 프라도(C.G. Prado)가 선제적 생명종결을 논하며 지적한 이론과 실제의 간격도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이론에서는 합리적인 죽음 선택이 가능하고 법과 제도가 그것을 인정하며 합리성을 보장하는 틀이 작동한다. 실제에서는 대부분의 결정이 낯선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환자와 가족은 양쪽 방향으로 압력을 받으며, 의료진은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환자와 상담해야 하고, 충분히 투쟁했는지는 아무도 판단하기 어렵다. 처한 환경과 조건 안에서 죽음의 요청은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환경과 조건 자체를 검토하지 않으면 그 합리성은 반쪽이다.

제도를 가진 나라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드러난다. 네덜란드는 안락사와 조력사망을 허용하지만 그 전제로 능동적인 완화의료와 보건의료체계의 통합을 두었다. 독일은 2015년 호스피스·완화의료법으로 완화의료 서비스와 사전돌봄계획 교육에 집중했다. 미국은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판결에서 입법으로 나아갔으되 안락사가 아닌 의학적 조력사망을 중심에 두었고, 영국은 보건의료와 가정간호를 통합하고 사전돌봄계획과 호스피스를 강조했다. 조력사망을 허용하든 하지 않든, 법과 제도가 한 일은 돌봄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삶의 마지막 시기에 선택은 제한되고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자유롭고 편안하고 깨끗한 죽음은 현실적인 기대가 아니다. 어떤 죽음도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한 죽음의 방식이 그것을 좋거나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 죽음은 미지의 것이고 그 과정은 종종 길고 고통스럽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을 지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다.

죽음에 대한 네 가지 태도

여기까지 오면 처음 질문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안락사가 좋은 죽음인지 묻다가 우리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안락사에 대한 답이 아니라, 인간이 죽음 앞에서 취해 온 태도들이다. 그 태도는 네 단어로 개관할 수 있다. 회피하기, 길들이기, 통제하기, 수용하기.

회피하기는 죽음을 유예시키는 태도다.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가장 오래된 태도이고, 의학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역이다. 죽음을 미룰 수 있게 된 것은 이 태도의 승리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이 승리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의미 없는 식물적 생명, 수치로 정립되지 않는 긴 와병, 존재의 지속이 삶의 목적과 끊어진 시간. 회피의 태도만으로는 이 시간을 다룰 수 없다. 연명의료결정제도는 회피의 끝자락에서 등장한다. 더 이상 미루는 것이 의미 없을 때 미루기를 멈추겠다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길들이기는 죽음의 괴로움을 줄이는 태도다. 죽음 자체는 손댈 수 없지만 죽는 과정은 인간의 일이므로, 그 과정을 덜 고통스럽게 만들려는 시도가 여기 속한다. 통증 조절, 섬망과 호흡 곤란의 관리, 호스피스와 완화의료가 이 태도의 실천이다. “이젠 좀 살겠네”라는 말이 나오는 자리가 여기다. 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조력사망 허용 여부와 무관하게 공통으로 투자한 것도 이 태도였다. 길들이기는 회피하기보다 겸손하다. 죽음을 이기려 하지 않고 죽음의 과정과 함께 지내려 하기 때문이다.

통제하기는 시기와 방식을 결정하려는 태도다. 조력사망과 안락사 논의는 바로 이 태도에서 나온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내가 정하겠다는 것이고, 자기결정권의 언어가 이 태도를 뒷받침한다. 이 태도는 정당한 근거를 가진다. 회피도 선호의 한 방식이며 죽음보다 나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의학적 조건이 갖춰진 죽음뿐이고, 사람들이 실제로 죽음을 요청하는 동기의 많은 부분은 그 조건 바깥에 있다. 시기와 방식을 통제하더라도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자유롭고 편안하고 깨끗한 죽음은 통제의 결과로 주어지지 않는다. 조력사망 논의가 ‘열린 질문’으로 남는 이유는 이 태도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 태도가 답할 수 있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기 때문이다.

수용하기는 더 나은 가치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태도다. 죽음의 나쁨이 경험 기회의 박탈이라면, 남은 기회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 마지막 물음이 된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위로받고 분노하거나 수용하고 성숙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기회. 수용하기는 죽음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시기로 보는 것이다. 머무르는 공간과 인간적 관계와 치료의 선택지가 모두 이 경험에 비추어 결정될 때, 죽음의 방식은 ‘나다움’에 관련된 선택이 된다. 좋은 죽음이라는 말이 억울하지 않게 쓰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여기뿐일 것이다.

네 태도는 단계라기보다 겹이다. 우리는 하나를 버리고 다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를 동시에 지닌 채 죽음 앞에 선다. 다만 어느 태도가 앞에 나와 있는지는 사람마다, 시기마다 다르다. 창구에서 “안락사 하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분은 통제하기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그 말의 동기를 들어 보면 길들이기가 필요한 고통이거나 수용하기가 가로막힌 관계인 경우가 많다. 의향서는 통제하기의 문서처럼 보이지만 실은 회피를 멈추고 길들이기와 수용하기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상담의 일은 그 사람이 지금 어느 태도에 서 있는지 듣는 데서 시작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안락사는 좋은 죽음인가. 이제 답할 수 있다. 어떤 죽음의 방식도 그 자체로 죽음을 좋게 만들지 않는다. 안락사와 조력사망은 적절한 생애말기돌봄의 맥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하고, 그 제도적 허용 여부는 열린 질문으로 남겨 두어도 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한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글의 첫머리에서 좋은 죽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난 뒤에야 따를 법한 이야기일지 모른다고 했다. 밀턴은 실명한 뒤에 쓴 소네트에서 빛을 거두어 가고도 낮 동안의 노동을 요구하시느냐고 묻다가, 인내의 목소리를 빌려 스스로 답한다. 수많은 천사들이 명령에 따라 육지와 대양을 쉬지 않고 달리지만, 다만 서서 기다리는 자들도 그분을 섬기는 것이라고. 회피하고 길들이고 통제하는 일이 달리는 일이라면, 수용하기는 서서 기다리는 일에 가깝다. 그것도 하나의 일이다. 어쩌면 마지막에 남는 유일한 일이다.

They also serve who only stand and wait.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의 시대

-1-

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AI 팀원’ 서비스를 내놓고 TV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나보다. 마케터, 작가, 디자이너 역할을 맡은 캐릭터들이 3D 가상 사무실에서 일하는 풍경을 사용자에게 보여준다. 오늘 아침에는 페이스북에서 여러 페르소나를 두고 AI를 부리는 방식이 대단한 성취처럼 소개하는 글도 읽었다. 나도 연구목적으로 역할을 나눈(페르소나라고 한단다) AI 도구를 만들어 쓰고 있어서, 이것이 혹시 상품성이 있는 일인지 궁금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만든 건 상품성이 없다. 역할을 나누는 구성 자체는 새롭지 않기도 해서. 그리고 RAG에 기반한 내 워크플로우는 가져다 쓰기도 복잡하다(시행착오를 기억해보면). 이런 역할분담이 새삼주목받는게 신기하긴 하다.

이런 역할을 분담하는 과제처리는 여러 오픈소스 프레임워크가 이미 제공하고 있는 기능인데 기억할 점은 역할을 부여한다고 결과가 좋아지는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았던 광고들은 개선된 서비스가 아니라 포장을 파는 것이었을까? 설치 없이 쓸 수 있다는 편의성, 기존 도구와의 연결된다는 약속, 작업 승인 절차의 보장 같은 것들이다. 일 잘하는 직원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결재 받으러 온다는 안정적인 비유. 아바타는 실제로 걸어 다니지 않지만 이 아바타가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풍경을 내려다 보는 것처럼 연출했다. 회사는 이 아바타를 사랑하게 될 것처럼 전제했다- 사용자는 고용주도 아니라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데 사랑하게 될까?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구독서비스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르겠다.

-2-


AI 혁신을 보면 모두가 조바심을 느끼고 서두르고 있는 듯하다. 기업은 AI 기업으로 보이지 않으면 저평가될까 조급하고, 개인 사용자도 AI 쓰지 않으면 뒤처질까(그게 기껏 온라인 주문, 예약인데도) 다급하다. (기술혁명에 과잉 투자는 피할 수 없긴 하다만.) 이게 학문 생태계에도 들이닥친듯 하다. AI로 문헌을 찾고 분석해 심사를 통과할 원고를 쓰고, 그 심사마저 (암암리에) AI가 한다. 독자는 다시 AI 요약으로 읽는다. 동료심사 보고서와 논문 초록의 적지 않은 비율이 이미 언어모델을 거쳤다는 분석(10~20%란다)도 나와 있다. 느리더라도 직접 읽고 정리하는 편이 나은 공부법이 있다. 글을 읽어봐야 잡히는 대화 (모든 글은 대화다. 저자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망설이고, 강변하고, 양보하며 타협을 시도한다)가 요약에는 생략되어 버린다. 필요한 것이 명제라면 뭐, 요약을 읽으면 되겠지만, 글을 읽는 행위가 자신도 바뀌는 상호작용이라는 점은 AI 문헌 분석에 포함될 수 없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도 자기 글의 운명을, 초록 – 그보다 짧은 결론 한줄-으로 한정되리라 생각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요즘 감당이 안되게 들어오는 리뷰 요청(예전에는 decline 버튼이라도 해줬는데 요즘은 그것도 건넌다. editor 심정으로는 decline도 고마운 응답이다)을 보면 그냥 글을 밀어내고 있는 것도 같다. 직접 읽고, 적은 글을 인용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대화를 담는 식으로 써서는 뒤처질 수 있다는 압력이 분명히 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은 특별한 전략을 고심하곤 한다- 인용을 많이 하는 것이 전략처럼 느껴진다, 아니면 자주 노출되지 않았을 ‘local’한 관점을 강조하기. 그렇게 출간해봐야 읽히리라는 보장도 없다. 누가 내 글을 인용했다는 고마운 메시지도 그게 사람이 읽은 건지 아님 AI가 걸러준건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흘린다. 이미 논문이 너무 많아져서 이전 10여 가지 저널을 쫓아가던 방식으로는 턱도 없어졌다. 이제는 저명한 저널에 게재해도 읽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소셜미디어가 학문적 소통 경로라는 주장도 나온다.
다만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은 AI 이전에도 있었다. 편수를 세는 평가 체계가 이미 그런 글을 대량으로 만들어 왔으며 AI는 그 병을 가속시켜 드러냈을 뿐이다. 텍스트가 넘칠수록 희소해지는 것은 사람의 판단, 직접 수집한 자료, 그리고 신뢰다. 느리게 읽는 일은 개인의 고집으로 남으면 뒤처짐이 되지만, 공동체의 규범이 되면 기준이 된다. 그 기준을 세우는 일이 지금 학회와 학술지가 해야 할 일은 아닌지- 요즘 학술지의 경향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3-

학술생태계는 더큰 정보생태계(infosphere)의 일부에 불과할수도 있다. 생태계는 모든 구성원이 agent-patient다.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읽고 인용한다- 내 글이 인용된다. 이게 이전의 이해였다면, 이제는 내가 글을 쓰고 소비하는 방식이 다른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내 방식 역시 변화된다. AI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최선의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나 혼자 느릿느릿 읽고 쓰면 되려는지, 이런 종류의 글을 쓸 것인지, 전통적인 학술 커뮤니케이션에 변화가 필요한 것인지.
그보다 근본적으로 학자가 쓴 글을 인정하는 (결국 보상이다, 학자는 글을 쓴다는 점에서는 노동자에 가까우니까) 방식의 변화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 방식이란 지식의 형태에 대한 다른 이해를 요구할 수도 있다. 통찰과 자기성찰, 일관성과 창조성 같은 것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 AI 활용도 이런 방식의 사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유튜브 건강정보,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가 — 스타틴 콘텐츠 파일럿과 학회의 과제

건강에 관한 궁금증이 생겼을 때 유튜브를 먼저 찾는 사람이 많다. 접근이 쉽고, 말로 설명해 주며, 진료실보다 부담이 적다. 그만큼 유튜브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유통되는 경로이기도 하다.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윤리위원회는 잘못된 건강정보(misinformation)와 의도적 허위정보(disinformation)에 대한 학회 차원의 대응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필자는 이 자리에서 고지혈증 치료제인 스타틴 관련 유튜브 콘텐츠를 중심으로 발표했다. 이 글은 발표 내용과 준비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시청자는 왜 보고, 제작자는 왜 올리는가

유튜브 건강정보를 평가하기 전에 두 가지 동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청자 쪽에서는 증상·진단·치료에 대한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답을 찾으려는 욕구가 있다. 진료 전후에 보완적으로 정보를 확인하려는 목적, 같은 처지의 경험담에 대한 수요, 그리고 자기 건강 문제를 스스로 이해하고 결정하고 싶다는 통제감의 욕구가 함께 작용한다. 처방받은 약을 수동적으로 먹기보다 식단을 조절하거나 자신이 고른 방법으로 관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제작자 쪽의 동기는 더 다양하다. 정확한 정보를 전하려는 공익적 동기, 전문성과 평판을 쌓으려는 동기, 조회수·광고·제품·커뮤니티 유입으로 이어지는 상업적 동기, 그리고 알고리즘에서 주목받기 위한 경쟁이 한 콘텐츠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와 건강의 관계를 다룬 사회학 문헌(Seale 2002, 2003)이 지적해 온 것처럼, 매체에서 건강 정보는 오락과 시장의 논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는 생활·예방 수준의 건강정보와 진단·치료·약물에 관한 의학정보의 경계가 흐려지고, 정보와 재미와 주장이 섞인 인포테인먼트 형식으로 소비된다. 시청자가 형식(친근한 오락)과 내용(의학적 주장)을 분리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연구가 보여주는 것

유튜브 건강정보에 대한 연구는 이미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체계적 문헌고찰은 유튜브 건강정보의 질이 대체로 평균 이하임을 보고한다(Madathil et al. 2015). 순환기 영역만 보아도, 스타틴 관련 온라인·유튜브 정보의 질과 가독성이 낮다는 보고(Kwan et al. 2024), 부정맥 영상의 68%가 저질로 분류되고 의학 배경을 가진 게시자의 영상이 오히려 덜 인기가 있었다는 보고(Luo et al. 2022)가 있다. 오도 영상이 유용한 영상보다 덜 소비되지 않는다는 관찰(Singh et al. 2012), 추천 네트워크 안에서 정확한 정보가 고위험 시청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분석(Yoon et al. 2022)도 반복된다. 질과 인기도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 분야의 일관된 결론이다.

이런 연구에서 흔히 쓰는 평가 도구가 JAMA 벤치마크(저자성·출처·공시·최신성), DISCERN(치료 정보의 질), Global Quality Score(전반적 질 5점 척도)다. 세 도구 모두 원래 문자 정보를 위해 만들어졌고, 영상에 적용할 때는 화면의 도표나 어조·편집 같은 비언어적 요소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선행연구와 비교하기 위해 표준 도구로 계속 쓰이고 있다.

스타틴 콘텐츠 파일럿에서 관찰한 것

발표에서는 2026년 8~9월에 ‘스타틴’, ‘고지혈증약 효과·부작용·중단’, ‘LDL 콜레스테롤’, ‘오메가3’ 등의 검색어로 수집한 한국어 유튜브 영상 가운데 전사가 가능한 23편을 대상으로 한 파일럿 결과를 소개했다. 평정은 위 세 도구에 내용·오정보 항목(주장의 정확성, 과장, 자의적 약물중단 권유, 비검증 대체요법, 위해 가능성, 상업적 연결)과 제작자 특성, 이해상충(COI) 고지 여부를 더한 코드북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단계의 평정은 대규모 언어모형이 수행한 1차 코딩이며, 전문가 평정과의 일치도 검증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아래 수치는 그 전제 위에서 읽어야 한다.

제작자 유형편수평균 GQS(1–5)COI 비고지약물중단 권유비검증 대체요법
전문의·의료 미디어84.6100
AI 시니어·일반 채널53.4000
일반인·신원미상43.5100
약사22.5211
상업 채널11.0111
치과의사(전공 밖)31.0303

몇 가지 관찰이 두드러진다. 신뢰도가 낮은 영상은 심혈관 분야가 전공이 아닌 치과의사, 자사 제품을 직접 판매하는 상업 채널, 특정 제품을 다수 추천하는 일부 약사 채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영상들에서는 자의적 약물중단이나 검증되지 않은 대체요법의 권유가 함께 나타났고, 자가 클리닉·시술 유도, 공동구매, 제휴로 추정되는 제품 추천 등 이해상충이 있었으나 대부분 고지되지 않았다. 반대로 전문의가 직접 말하거나 의료 미디어가 전문의를 초대한 영상은 오히려 유튜브의 오정보에 대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약을 임의로 끊지 말라는 경고를 반복했으며, 일부는 협찬 관계가 없음을 명시했다. 인공지능 내레이션으로 만들어진 시니어 대상 채널은 제목이 자극적인 경우가 있었으나 내용은 대체로 균형이 잡혀 있었고, 약과 식단의 병행을 강조했다.

또 하나 눈에 띈 것은 제목과 내용의 괴리다. “고지혈증은 병이 아니다”, “의사들이 부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 같은 제목을 단 영상의 실제 내용이 스타틴 치료의 근거를 설명하는 균형 잡힌 것인 경우가 있었다. 제목만으로 시청 여부를 결정하는 환경에서는 이런 괴리 자체가 오해를 낳는다.

이 파일럿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표본이 23편에 불과하고, 평정이 전문가 확정 전의 1차 코딩이며, 전사 텍스트에 기반해 화면과 비언어적 요소를 반영하지 못했다. 이해상충 판정 중 일부(특정 약제군 소개가 협찬인지 여부 등)는 경계 사례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제작자의 특성과 이해상충 고지 여부가 콘텐츠 신뢰도와 함께 움직인다는 경향은 본 연구에서 검증할 가치가 있는 가설로 보인다.

기관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건강 오정보에 대한 대응은 개인의 판별력에만 맡길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 공중보건총감은 2021년 권고에서 오정보 대응을 사회 전체의 과제로 규정하고 개인·가족, 보건 전문가와 기관, 기술 플랫폼, 연구·교육기관, 정부의 역할을 각각 제시했다. 플랫폼에 대해서는 추천 알고리즘이 오정보를 증폭하지 않도록 재설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노출하며, 연구자에게 데이터를 제공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WHO는 인포데믹 관리를 위한 연구 의제를 측정, 신호 탐지, 개입, 회복력 강화, 도구 개발의 다섯 축으로 정리했다(Calleja et al. 2021).

순환기 학회의 대응 사례로는 미국심장협회의 두 과학성명을 들 수 있다. 하나는 영양 오정보의 확산에 대응해 대중적 식이패턴이 협회 식이지침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평가하고, 임상가와 소비자가 특정 식단을 판단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 것이다(Gardner et al. 2023). 다른 하나는 공유의사결정에 관한 성명으로, 임상가의 의사소통 교육, 다학제 팀, 환자의 문해 수준에 맞춘 의사결정 보조도구를 전략으로 제시한다(Dennison Himmelfarb et al. 2023).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시청자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하나다. 유튜브에서 본 내용을 근거로 약을 끊거나 치료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특히 스타틴처럼 효과가 즉시 체감되지 않는 만성질환 약물은 중단의 결과가 늦게, 그러나 크게 나타난다. 걱정되는 내용이 있다면 진료실에서 “유튜브에서 이런 내용을 봤는데 괜찮은가”라고 그대로 묻는 것이 낫다. 이런 질문을 주고받는 과정이 공유의사결정이며, 파일럿에서 관찰한 전문의 영상들도 같은 권고를 하고 있었다.

임상가의 입장에서는 환자가 유튜브에서 어떤 주장을 접했을 가능성을 전제하고 상담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정보의 유형은 반복된다. 스타틴이 당뇨나 치매를 일으킨다는 주장, 오메가3나 홍국 같은 보조식품이 약을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 특정 식단이 수치를 정상화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유형을 미리 알고 있으면 상담에서 선제적으로 다룰 수 있다.

학회 차원에서는 몇 가지 실행 과제를 생각할 수 있다. 학회 명의로 스타틴·오메가3·콜레스테롤에 관한 핵심 메시지를 표준화한 대중용 자료를 만드는 것, 반복되는 오정보 유형을 목록화하고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것, 회원 전문가가 만드는 콘텐츠를 지원하고 큐레이션하는 것, 그리고 제작자의 자격·이해관계·근거 수준을 표시하는 규범을 제안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시도하고 있는 인공지능 보조 평정은 대량의 콘텐츠를 1차 선별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을지 검토 중이다.

유튜브는 이미 주요한 건강정보 경로가 되었고, 그 안에는 질 높은 전문가 콘텐츠와 상업적 목적이 섞인 콘텐츠가 함께 있다. 파일럿에서 관찰한 것은 이 둘을 가르는 요인이 제작자가 누구이며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밝히는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음 단계는 전문가 평정과 인공지능 평정의 일치도를 검증하고, 이 경향이 더 큰 표본에서 유지되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이 글의 초안은 생성형 AI(Claude, Anthropic)를 활용하여 작성되었다. 작성자가 강연 내용과 발표 자료를 제공하고 구성 방향을 지시하여 초안을 생성하였으며, 이후 작성자가 내용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수정·보완하여 최종안을 확정하였다. 최종 내용에 대한 판단과 책임은 전적으로 작성자에게 있다.

참고문헌

  • Seale C. Media and Health. London: Sage; 2002. / Seale C. Health and media: an overview. Sociology of Health & Illness 2003;25(6):513-531.
  • Madathil KC, et al. Healthcare information on YouTube: a systematic review. Health Informatics J 2015;21(3):173-94.
  • Kwan JY, et al. Assessment of internet-based information on statin therapy. Eur J Cardiovasc Nurs 2024;23(2):115-121.
  • Luo C, et al. Does YouTube provide qualified patient education videos about atrial fibrillation? Front Public Health 2022;10:925691.
  • Singh AG, Singh S, Singh PP. YouTube for information on rheumatoid arthritis—a wakeup call? J Rheumatol 2012;39(5):899-903.
  • Yoon HY, et al. Understanding the social mechanism of cancer misinformation spread on YouTube. J Med Internet Res 2022;24(11):e39571.
  • Office of the U.S. Surgeon General. Confronting Health Misinformation. Washington, DC: US HHS; 2021.
  • Calleja N, et al. A public health research agenda for managing infodemics. JMIR Infodemiology 2021;1(1):e30979.
  • Gardner CD, et al. Popular dietary patterns: alignment with AHA 2021 dietary guidance. Circulation 2023;147(22):1715-1730.
  • Dennison Himmelfarb CR, et al. Shared decision-making and cardiovascular health. Circulation 2023;148(11):912-931.

단번에 끝낼 수 없는 것들: 멜버른 출장을 다녀와서

지난 9월 2일부터 5일까지 보건복지부 생애말기돌봄계획수립 연구의 일환으로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을 다녀왔다. 연구실 동료들과 복지부 담당자가 함께한 짧은 일정이어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거나 펭귄 서식지를 방문하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걸 사람들로 채웠다고 하면 억지일까?
첫날 오후 VAD Care Navigator(Voluntary Assisted Dying Care Navigator) 팀을 만나러 St. Vincent의 Peter MacCallum 센터로갔다. 빅토리아를 포함해서 호주의 생애말기돌봄 제도는 UK와 비슷한 시기 정립되기 시작했으나 이후 제도의 정립, 운영과 개선 작업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점진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호주의 VAD가 법으로 존재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곤 하지만 방문의 목적은 입법에 이르는 과정이었고, 제도화 이후 지속적으로 의견을 수집하고 반영하는 전력에 관한 것이었다. 이날 방문한 센터는 정책보다는 실행 조직이었는데 이들이 이해하고 있는 제도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시행 중인 VAD 제도를 환자 돌봄의 수준을 높이는 방식으로, 환자에게 가능한 선택지를 추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결정을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상의하는데 집중하는 것을 들었다- 7년간 환자와 현장의 경험으로 다듬어졌다고 말했다. 자격을 얻은 사람의 약 3분의 1이 끝내 약물을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오래 남는다. 그들에게 VAD는 죽음의 선택이 아니라 남은 삶을 안정시키는 통제감이었다.
이튿날 주에는 빅토리아 보건부(Department of Health)와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독립한 조직인 Safer Care Victoria를 방문했다. 보건부의 생애말기돌봄 정책 유닛이 우리를 맞아 주었고 이들은 완화의료, 사전돌봄계획(ACP), VAD를 따로 떼지 않고 하나의 생애말기 돌봄 체계로 묶어 설명했다. 반복된 원리는 세 가지였다. 문서보다 대화가 먼저이고, 치료가 줄어도 돌봄은 지속되며, 환자뿐 아니라 의료인도 보호받아야 제도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맞아주었던 책임관(Peter Mac에서 완화의료를 담당하던 나이 지긋한 임상의사 Mark Boughey가 생애말기돌봄을 총괄하는 디렉터로 옮긴 것도 인상적이었다)은 우리를 다른 연구자, Queens’s University에서 ELLC라는 프로그램 (임상의사들에게 생애말기돌봄관련 법률 교육을 제공)을 총괄하는 동료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 한국 동료들이 우리가 10~15년 전 고민했던 문제를 다루고 있어’
같은 날 오후에 일차의료학회(RACGP)의 생애말기돌봄 연구모임 책임자와 면담을 할 수 있었다. 오후에 온라인으로 만난 RACGP 일반의들은 좀 더 솔직했다. 법과 전자기록, 수가가 다 갖춰져도 의사와 환자가 서로 먼저 말 꺼내기를 기다리는 “상호 대기”는 여전하며, 전국 단위 모니터링이 부족했던 점은 자국의 아쉬움이라고 했다. 비슷한 고민이 있다는 것이 위로였다면 문제해결을 위해 학회가 교육과 자격관리(한국에도 있는 연수평점제도를 활용해서)를 통해 상황을 개선하고 있다는 점은 숙제로 남겨졌다. 이런 순간은 내가 임상의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마지막 날 Monash Bioethics Centre에서는 두 WHO 협력센터가 학생교류, 정기 웨비나, 공동연구로 이어질 협력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학생들은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한국 대학의 일개 연구진을 부총장까지 나와 메인 회의실에서 행사를 해 준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hospitality일터, 그러나 부담도 남았다. 연구자들을 만나니 기관을 찾아다니며 느끼던 부담이 조금 덜어졌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맞아준 사람들이 있다. 첫날은 Rob Sparrow와 Justin Oakley 교수가, 둘째 날은 연수와 있는 송인규 교수가 (장소 소개로- 이방인에게 밥먹을 만한 곳을 소개해 주는 것은 꽤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 날은 이제는 큰 형님 같은 Eshan Gooshki 교수가 페르시안 쿠진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한국의 연명의료결정이 사망 며칠 전에 몰리는 구조를 바꾸는 일은 서식 하나를 고치는 일이 아니다. 지침, 교육, 수가, 기록, 내비게이션, 그리고 공론화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멜버른은 그것을 20년 가까이 해 온 곳이었다.

인공지능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AI 리터러시는 무엇을 읽는 능력인가


AI 리터러시를 흔히 도구를 다루는 기술로, 즉 프롬프트를 잘 쓰고, 어떤 모델이 무엇에 강한지 알고, 결과물을 업무에 끼워 넣는 숙련을 가리키는 말로 좁게 이해하고 사용한다. 분명히 이 기술적 층위는 필요하다. 생성 모델이 통계적 패턴으로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장치라는 사실, 그래서 사실과 그럴듯한 허구를 똑같이 자신감 있게 출력한다는 한계, 답변에는 학습 데이터의 편향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모르면 안된다. 이것은 도구가 산출하는 결과물을 검증하는 태도를 요청한다. 이렇게 기술의 작동 원리, 적용 사례, 한계, 그리고 개인정보나 저작권 같은 사용상의 주의점을 강조하는 것이 리터러시의 기본 항목이다.


그러나 이 목록은 모두 기술을 대상으로 한다. 모델이 무엇을 하는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를 묻기는 하는데, 정작 그 도구를 쓰는 사람 자신은 관심의 대상 밖이다. 같은 챗봇의 결과물을 어떤 사람은 초안으로 여기고 받아 고쳐 쓰지만, 어떤 사람은 그대로 제출한다. 어떤 사람은 모델에게 반박을 요구한 뒤 검토하고, 어떤 사람은 답변 중에서 자기 생각을 확인해 주는 문장만 골라 읽는다. 도구의 성능이 같아도 결과가 갈리는 지점은 사용자의 습관과 성향에 있다.

그래서 리터러시에는 자기 자신을 읽는 항목이 들어가야 한다. AI에 맡기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경계가 인공지능의 능력에 따라 그은 것인지, 아니면 편의-귀찮음-에 따른 것인지, 모델이 유창하게 답할 때 나는 검증을 건너뛰는 습관이 있는가.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질문하고 있지는 않은가 같은 물음은 기술 지식과는 다른 종류의 지식을 요구한다. 아주 쉽게는 자신의 사용 기록을 돌아보아야만 답할 수 있다.

자기 취약점을 아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사람마다 약한 지점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수치에, 어떤 사람은 매끄러운 문장에 쉽게 설득된다. 2,784명을 대상으로 한 한 실험에서는 AI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일수록 잘못된 제안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고, 회의적인 사람이 오류를 더 안정적으로 잡아냈다 모델의 한계만큼이나, 빨리 판단을 끝내려는 조바심과 권위 있어 보이는 출처에 기대려는 경향 같은 사용자 자신의 한계가 오류의 원인이 된다.
결국 AI 리터러시는 두 방향의 읽기다. 도구를 읽는 능력과 그 도구를 쓰는 자신을 읽는 능력. 앞의 것만 갖춘 사람은 성능 좋은 도구를 손에 쥐고도 자기 편향을 증폭한다. AI를 잘 쓴다는 말은 도구를 아는 동시에 자신을 아는 상태를 가리킨다.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다

이번 주 네이처에는 한국의 부끄러운 실상이 하나 더 공개되었다. 기자는 이런 기행(奇行)-기행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의 배후에 한국의 입시제도가 있다고 지적한다. 

두 가지 요소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쉬운 저자자격, 그리고 어려운 대학입시. 아무 것이나 덕지덕지 가져다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더러운 근성도 이야기 해야 할까? 스크린샷 2018 02 08 19 24 51

태어나는 것은 무조건 좋은가?

내가 구독하는 블로그에는 신학교(Trinity International University, TIU) 에서 운영하는 생명윤리 블로그도 포함되어 있다. 이 블로그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논문이 하나 있었는데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탄소 배출량이 증가해서 결국 환경에 부담이 된다는 내용의 논문이다. 논문의 결론은 개인은 환경에 미치는 부담을 고려해서 출산을 결정해야 한다는 다소 윤리적인 내용이었다. 

TIU 블로그는 논문이 출산을 도덕적으로 해를 입히는 행위로 간주한다고 하여 우려를 표한다. 사람 생명의 측정할 수 없는 가치(the immeasurable value of a human life)는 말 그대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측정할 수 있는 탄소배출량보다 가볍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블로그는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입장(natalism의 입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영국의 철학자 Derek Parfitt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좋고 아이의 수가 많을수록 더 좋다면, 아이들이 형편없는 환경에 처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가?” 우리 직관은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것 같다. 아마 신중한 답변은 “일정한 생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다는 조건 아래서 인구가 많을수록 좋다” 정도가 될 것 같다.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일정한 수준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탄소배출량과 지구온난화는 생활수준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인가? 어떤 환경주의자들은 인간없는 세상을 상상하고, 어떻게든 인류가 – 집합적으로- 산아제한을 하자고 주장한다. (인간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이 주장이 심한 것 같은가? 아이가 무조건 축복이라는 농경시대 관습은 심하지 않은가? 

임신중절을 법으로 막지 말라

더 이상 이념이 우리 사회에 휘몰아치지 않게 바뀌기를 바란다. 원래 생명윤리문제는 이념적인 것인가? 

1. 현상은 이념적이다.

낙태, 안락사, 줄기세포와 같은 문제들은 종교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자원분배와 사람대상연구는 정치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이념을 품고 들어온다. 이들의 이념과 헌신이 없었다면 생명윤리가 오늘날과 같이 인정받는 분야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적, 정치적 신념은 흔히 묵살당하는 생명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만들게 했고 담론의 주제가 되게 하고 결국에는 학문의 영역으로 발전시켰다.  

 

2. 현상은 정당화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교조주의 탓일지, 이들의 신념은 강압적이며 타협-검증을 거부한다. 다원화된 한국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조직화할 수 있는 이 두 집단은 소수임에도 “효울적, 효과적”으로 자기 논제를 관철시켰다. 생명을 기치로 든 자들은 실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 논변도 정치제도를 통한 의사결정도 거부한 채 다시 인력을 동원하는 최근의 낙태관련 논쟁을 보니, 이들은 결국 교권주의자에 불과하다. 솔직히 이들의 서명운동은 내부단합용이고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더이상 합리성을 기대하기 어려워졌구나. 

치매, 곤경

죽음, 죽어감에 관한 논의에서는 돌봄과 자기결정권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제시된다. “어떻게 하면 불편함을 줄이고 생명의 존엄을 유지할 것인가?”가 돌봄의 원칙이 해결하려는 질문이라면, “인격체로서 자기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실천하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가 자기결정권의 원칙과 관련된 문제다.
최근에 흥미롭게 읽었던 어느 잡지(시애틀법대 학술지) 특별호는 돌봄과 자기결정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다룬다. 바로 치매환자의 자기결정권 존중의 문제다.

치매가 고약한 것은 이 병이 판단과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또 이것이 이 병의 가장 분명한 진행경과다. 어떤 이들은 치매가 심해지면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리라. 그런데 이 요청을 어떻게 ‘확인’하고 ‘실행’할 것인가? . 급식관을 통한 영양공급(인공영양공급)은 미국 법제 안에서 전적으로 환자와 가족이 결정할 수 있고, 환자가 이전에 서류를 작성해 두었다면 시작하면 안된다. 즉 환자가 중등도 이상의 치매 때문에 의사능력을 상실한 상황이라면, 그리고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다면 비위관(콧줄)을 통한 영양공급은 거부할 수 있는 치료 방식이 된다. 미국의 환자교육 자료에서는 이런 종류의 영양공급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문제는 최근에 일부에서 제시하는 자발적 금식중지(Voluntary Stopping of Eating and Diet, VSED)의 문제다. 어떤 사람이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금식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해도 강제로 급식하면 안된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합의된 사항이다.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성인이 먹지 않겠다면 존중해야 한다.그런데 치매환자(의사결정능력이 없는)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몇 가지 가능한 경우가 있다.
1.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치매 노인이 급식을 거부한다.
2. 이전, 치매가 많이 진행되기 전에 환자가 치매가 많이 진행되어 직접 먹을 수 없게 되면 급식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노인이 급식을 거부한다.
3. 급식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정작 중단하니 먹겠다고 한다.

2.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판단이 쉽다 (실천은 별개로 하자. 어려우니까).
1.의 경우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저 밥이 맛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그보다 깊은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존중할만한 이유인지.
3.의 경우가 앞서 논문들이 다룬 내용이다. 말 그대로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이전의 부탁을 이유로 ‘굶길’ 것인가? 이것이 허용되는 치료 방식인가?

잠정적인 결론은 있지만 아직 잘 정리되지는 않았다. 또 1.의 경우 일반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 2.도 무조건 중단하는 것은 경솔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좀 더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의 치매 환자를 윤리적으로 돌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